UM HEE JOO


AIR CONDITIONING

2023. 05. 17. Wed
             |
2023. 05. 28. Sun


︎




<Air conditioning>


-

모든 계절을 거스르는 곳, 사무실은 그런 공간이다. 그리하여 나는 여름 장맛비가 쏟아지는 아침에 창밖을 바라보며 비 맞는 매미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출근을 생각한다.

-

사무실은 일과 효율을 숭배한다. 효율적으로 일하려면 계절에 구애받지 않아야 하므로 사무실은 계절을 거스르기 위한 여러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냉난방기와 형광등. 'air conditioning'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공기와 빛을 조절해 특정 조건에 익숙해지게 한다. 처음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천장형 냉난방기는 나의 기관지와 눈을 바짝 말려버렸다. 나의 눈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형광등은 확인 사살에 들어간다. 형광등은 아침 9시부터 켜져 있고, 겨울엔 난방 여름엔 에어콘이 나온다. 여름에는 장맛비를 겨울에는 폭설을 뚫고 사무실에 도착하면 젖은 신발, 바지 밑단 그리고 나의 등을 시원하게 혹은 따뜻하게 말려준다. 쾌적하게 일할 수 있도록. 유영공간에 미팅차 방문하였을 때 스탠드형 에어콘이 눈에 띄었다. 전시장도 계절을 거스른다. 나는 이곳이 비자연적인 공간임을 드러내기 위해 냉난방기와 형광등 형태의 air conditioning monument를 세운다. 우리가 계절을 거스르면 그 잔해는 고스란히 외부로 배출된다. 우리는 이렇게까지 거스르며 무엇을 위해 앉아있을까. 창작자들은 시스템을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자들이 아니라 반문하는 사람들이다.

-

일정한 시간에 사무실로 들어가고 빠져나오는 사람 무리를 보았다. 경이롭고 대단했다.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게 느껴지는가 하면,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한다는 사실보다 그 시간 동안 한 공간에만 머무른다는 것이 대단했다. 사무실에는 창작자들도 앉아있다. 창작자들의 작업에는 그들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기 마련이다. 나를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곳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게 될까. 다들 어떤 건물의 사무실로 흩어질까. 내가 궁금한 것은 이런 규칙이 생겨난 사회적 배경, 규칙이 이행되는 장소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계절을 보내는 방법.

-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이동의 제약을 받았지만, 도리어 사무실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경험했다. 어쩌면 재택근무는 기술적으로 이미 가능했을 것이다. 예전엔 토요일 12시까지 영업하는 곳이 흔했다. 주 5일제 도입 땐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전염병으로 출근길이 위태로워지자 재택근무가 재빠르게 도입되었다. 재택근무를 다시 금지하려는 회사에 대한 뉴스를 보았고, 이와 같은 회사의 정책에 회사원들은 큰 반감을 표했고, 그런 회사원들에게 게으르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업종에 따라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곳도 있지만, 재택근무의 개념이 ‘집에서 근무’로 국한되지 않고 정형화된 공간으로부터의 해방으로 확장되기를 바란다. 일하는 자들이 변하는 계절을 겪을 수 있도록.

-

사무실에 앉아 아무도 봐주지 않는 시를 쓰고 에스키스를 그린다.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뭘 한다고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감정은 사무적인 일의 효율성을 떨어트리기에 바짝 말린다.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무거운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고 싶다. 어제저녁 친구가 씨네21의 김혜리 기자의 트윗을 읽고 나에게 전화했다. 트윗의 내용은 이와 같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문의 글을 쓰지 않다 보면 어느 새벽, 당신은 읽는 이가 기다린대도 긴 글을 쓸 수 없게 됐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도 먹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리하지 않다 보면 혼자만의 식사도 거칠어진다. 당신의 우주는 그런 식으로 비좁아져 간다.” 그리하여 사실 우리는 비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주를 넓히는 중인 것이라고 친구가 말해주었다. 그 순간 나의 우주가 보였다.

-

<포스트잇-모란디> 시리즈는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의 작업방식을 빌려, 돈 벌기와 창작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는 창작자들의 균형 잡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란디는 나라에 전쟁이 나도 자신의 방 안에서 평생 정물화만 그렸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병이 지닌 본래의 속성이나 디테일이 아니었다. 가시적인 것에 내재 되어있는 무언가였고, 이를 찾기 위해 사물을 익명으로 만들었다. 이름 없는 사물은 몽달귀신 같기도 한데, 어쩐지 그의 그림은 따뜻하다. 사무실의 모란디가 되어 <포스트잇-모란디>를 일기 쓰듯 만든다. 포스트잇을 손에 들고 컴퓨터 모니터로 모란디의 작품을 살펴보며 그날에 어울리는 그림을 택한다. 그리고 그가 정물을 통해 보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하며 균형잡기를 한다. 그리고 이 균형잡기는 나의 우주가 좁아지지 않게 해주는 최소한의 움직임이었다.

-

나의 질문에 air conditioning monument는 넘어지며 고백하고 만다. 여름에 쓰지 않은 여름의 시는 바다 소금 냄새가 담기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