𝚃𝚑𝚘𝚞𝚐𝚑𝚝 𝙴𝚡𝚙𝚎𝚛𝚒𝚖𝚎𝚗𝚝 𝚘𝚏 𝙸𝚖𝚙𝚕𝚒𝚌𝚒𝚝 𝙾𝚛𝚍𝚎𝚛
정윤주
𝙹𝚞𝚗𝚐 𝚈𝚘𝚘𝚗𝚣𝚘𝚘
𝟸𝟶𝟸𝟻.𝟶𝟼.𝟸𝟻. - 𝟶𝟽.𝟶𝟼. 𝚆𝚎𝚍 - 𝚂𝚞𝚗 𝟷 - 𝟽𝚙.𝚖.






숨겨진 질서의 사고실험
정윤주
작은 점, 도형으로 읽히는 형태들, 좁은 면적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얇거나 두꺼운 선 등이 색채로써 화면을 채우고 있다. 패턴으로 보이기도 하고, 사각형 · 원형 · 삼각형 등의 기하학 형태로 화면을 구성하는 절대주의를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논점을 흐리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를 구태여 하는 이유는 흥미로운 해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업실에 방문한 동료가 드로잉 앞을 어슬렁거리며, 어쩐지 러시아가 생각나는 게 아마도 카지미르 말레비치 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을 때 반가운 마음이 되었다. 그와 나는 미술의 기원에서부터 현대까지 이르는 여러 사조에 서로의 작업을 비추어 보고, 겹치는 구간을 찾아내기를 즐겼다. 발견한 개념을 다시 훑고, 당대 작가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놀이였다.
공통된 서사로 이어지는 화면들을 ‘숨겨진 질서의 사고 실험’이라 명명했다. ‘숨겨진 질서는 우리가 인식하고 측정하는 수준에서는 드러나지 않을 수 있지만, 현상들의 패턴과 규칙성에 의해 드러날 수 있다.’고 물리학자 데이비드 봄 David Bohm 은 말했다. 드로잉이라는 방식으로 수차례 거듭한 사고 실험은 어떤 질서를 숨기고 있을까.
2024년 4월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개월간 바르셀로나 (스페인) 를 시작으로 리스본, 신트라, 오비두스, 코임브라, 아베이루, 포르투 (포르투갈) 에 머물렀으며, 마르세유, 툴루즈, 알비, 꼬흐드 슈흐 씨엘 (프랑스) 과 나폴리, 시칠리아, 로마, 볼로냐 (이탈리아)를 거쳐 다시 파리 (프랑스) 를 여행했다.
쉬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한 여행은 비교적 긴 시간 머물렀던 포르투갈에서부터 변모했다. 낯선 장소에서 그곳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은 새로운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매일을 채우는 당연한 행위도 어딘가 다르게 다가왔다. 양치하며 앞니를 닦을 때도 새 칫솔과 새 치약의 낯선 질감에 대해 문장으로 떠올렸다. 작고 크게 남겨진 인상들은 작업의 형태로 연결하려는 생각으로 금세 이어졌지만 여행을 해치게 되어버릴까 생각의 길이가 길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작업에 관한 생각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몇 가지 대책이 있었는데, 예를 들자면 1센트도 남기지 않고 사용한 돈을 기재하는 것, 가능한 한 영수증을 모으고 순간적인 감상들을 기록하는 것 등이 있었다. 모두 쉬운 일은 아니었다. 쌓여 있는 영수증을 돌아온 자리에서 정리하며 평소라면 기억하지 않을 작은 순간들을 높은 확률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여러 국가의 낯선 언어 옆에 갈겨쓴 해석을 정리하고 머물렀던 자리와 스쳐 지나간 장소를 구글맵으로 다시 걸었다. 사용한 돈은 교환한 가치의 척도가 되어 기록으로 남겨졌다. 이제 그것들을 시각화할 차례였다.
유로 통화를 종이에 대고 사각형 (5유로·10유로·20유로·50유로 등), 원형 (1센트·10센트·20센트·50센트 등) 을 그렸다. 동전 옆면의 두께와 지름을 측정해 얇은 직사각형을, 여러 개의 동전을 쌓은 면적을 측정해 정사각형에 가까운 직사각형을 그렸다. 다음으로 한 바퀴 구른 동전의 둘레와 두께를 측정하여 띠를 만들고, 수십 개의 띠를 엮어 패턴을 만들기도 했다. 각각의 화면에 색채로써 나타나는 면적을 모두 더하면, 그 화면의 가치, 주제, 감상이 되도록 했다.
하나의 예로 로마 여행 막바지에 있었던 일화와 그 일화가 담긴 드로잉에 대해 말해볼 수 있겠다.
좋아하는 작가인 조르조 모란디 Giorgio Morandi 가 살았던 볼로냐를 당일치기로 다녀올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가 머물며 작업했던 집과그가 수집하고 변형한 오브제들을 직접 보고 싶었지만, 창밖으로 이글거리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자니 선뜻 길을 나서기가 망설여졌다. 소매치기를 당하고 바가지를 쓰는 작은 사고들부터 유럽 곳곳에 진행되고 있는 공사 탓에 보고 싶었던 것들을 보지 못 하고 헛걸음하는 일이 반복되며 긴 여행의 피로가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쩌면 다시 이곳에 오지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리나케 볼로냐 현대미술관에 메일을 보냈고, 그의 집에 방문이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확정 지어두었다.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고 버스에 올랐던 날이 떠오른다. 낯선 도시들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볼로냐로 가는 버스 요금은 62유로였다. 1유로가 62개, 1유로 원형의 지름은 23.25밀리미터. 62개의 원형을 겹쳐 그리고 불투명한 과슈 물감의 아이보리 블랙으로 채워 넣었다. 더욱 염세적으로 변해버린 텁텁한 그날 아침의 기분은 그런 색깔이 어울린다. 시간이 넉넉잖았던 터라 모란디 작업을 언제나 볼 수 있는 볼로냐 현대미술관과 그의 집, 두 곳만을 제대로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어두운 플랫폼을 빠져나와 도시의 중심부로 향할 때 갑자기 모란디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포근한 건물의 색깔과 떨어지는 오후의 빛은 깊이 있게 쌓인 그의 그림 속 색감들을 떠올리게 했다. 미술관에는 책을 통해 알았던 작품들을 비롯하여 알지 못했던 판화 작업, 풍경 페인팅 등이 있었다. 느린 걸음으로 하나씩 차곡차곡 그림을 지날 때 그림 속 붓터치에서 그의 기분을 느꼈고, 그가 중요시했던 것들을 상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돌아가 들여다보며 머물렀다.
열띤 관람을 하고 나니 허기가 져서 길을 걷다 친근감이 느껴지는 오래된 식당에 들어갔다. 신선한 해산물과 토마토가 듬뿍 들어간 파스타와 화이트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깨끗한 식탁보와 다정한 직원의 인사가 여행의 피로를 녹여주는 듯했다. 가게 이름은 ‘LA PRAIA’. 시칠리아 방언으로 ‘해변’이라는 뜻을 가진 그곳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몇 시간 뒤면 볼로냐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식당을 빠져나와 모란디의 집을 향해 걸었다. 소란한 중심가를 몇 블록 벗어나니 길가 벤치에는 걸터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부드러운 황갈색이나 따뜻한 베이지색의 궁륭은 우아한 균형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란디의 집 앞에 도착하여 벨을 누르고 커다란 올리브 나무가 있는 중정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방금 전 미술관에서 그림으로 만난 수많은 오브제 위로 소복한 먼지가 적절하게 쌓여 있었고 곳곳이 페인트로 덧칠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동네와 그의 집, 작업실의 적당하게 빛바래도록 손봐둔 것들을 보며 그가 보이는 대로 그려내고자 얼마나 애써왔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도 보이는 대로 그려내고자 하여 꽃을 그릴 때 꽃에도 원하는 양의 먼지가 쌓일 수 있도록 했다는 작업 단계에 감탄했다. (그의 실력이라면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해 그리는 것쯤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그림은 그가 머물던 곳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다. 옅은 보랏빛을 뿜는 상아색 도자기와 먼지를 뚫고 번져 나오는 푸른색 병을 잊지 말자고 생각했다.
로마로 돌아오는 버스 요금은 57유로 83센트였다. 1유로 57개 (지름 23.25mm), 50센트 1개 (지름 24.25mm), 20센트 1개 (지름 22.25mm), 10센트 1개 (지름 19.75mm), 1센트 3개 (지름 16.25mm), 총 63개의 원형을 그리고 부드럽게 번지는 유화 물감으로 그날의 기억을 표현했다.
여행 속 작은 여행은 이렇게 두 장의 드로잉으로 남겨졌다. 드로잉의 형식을 빌린 사고 실험에는 숨겨진 질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