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국적/ Dual Citizenship



이중국적: Dual Citizenship

김혜리 Haerri Kim


2025. 04. 16 - 04. 27


Wed- Sun


유영공간Space Uooyoung






심리적 무균실의 윤곽을 따라



조유경 (유영공간 디렉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두 개의 시민권을 부여받는다. 하나는 건강한 자들의 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병든 자들의 왕국이다.” —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1



김혜리의 작업은 경계 위에 선 감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명명되지 않는 내면의 진동들—어딘가에서 비롯되어 다시 사라지는 감정의 파편들이, 작업의 표면 위를 조용히 지나간다. 작가는 자신이 겪은 세계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고통이나 불안, 정체성의 균열과 같은 개인적인 경험들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그 잔향을 이미지와 구조로 감각하게 만든다. 색과 질감, 재료와 거리, 시간의 어긋남 속에서 감정이 지나간 자리를 천천히 따라가며, 그것을 작업의 구조로 바꾼다. 이 전시는 서사보다 표면, 해석보다 감각의 층위로 말한다.


전시의 중심에는 ‘심리적 무균실’이라는 가상의 공간이 놓여 있다. 무균실은 외부의 감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구조이지만, 동시에 안에 있는 존재를 고립시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중적인 의미망을 지닌 무균실을 심리적 개념으로 전환시켜, 정서적 자가 격리 상태를 은유한다. 이 무균실은 완전한 해석이 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파편적인 감각과 이미지, 그리고 조용한 반작용들이 잠재된 공간으로 제시된다. 작품은 무균실 안에서 출현한 이미지들을 통해 내면의 방어기제를 형상화한다. 이들은 모두 도구이자 장치이며, 동시에 감정의 흔적이다.


빛은 표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김혜리의 그림을 마주할 때, 우리는 그 표면에 도달하기까지의 오랜 층을 먼저 느끼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은 가장 마지막에 쌓인 것이다. 그 아래에는 겹겹이 밀착된 색과 선, 번복된 감정의 조각들, 그리고 무수히 다시 그어진 이미지들이 가만히 누워 있다.


김혜리의 작업은 스케치로부터 시작된다. 디지털 프로그램 안에서 조형을 돌리고, 왜곡시키고, 한 겹씩 덧대며 형태를 찾아간다. 이후 그것은 다시 영상의 시간 위에 얹히고, 프린트되어 부조로 옮겨지며, 연필과 채색으로, 손의 결을 따라 그려지며 그 모든 작업은 단 한 번의 시작과 끝이 아니라, 감정이 지닌 시간성을 손으로 되감는 과정이된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매체인가가 아니다. 무엇이든 그녀의 언어가 될 수 있다면—디지털 도구이든, 아날로그 표면이든, 입체든 평면이든, 영상이든 연필 선이든— 그것은 모두 감정을 담아내는 하나의 조형 언어가 된다. 작업은 재료에 순응하지 않고, 오히려 재료를 따라 끌어가는 감정의 리듬 속에서 완성된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매끄럽지 않은 결들이 숨어 있다. 단단하고 밀도 높은 색들이 레이어 위에 단호하게 얹히고, 표면은 일견 반짝이지만, 그 반짝임은 생채기처럼 얇고 조용하고, 또 유려하며 정교하고, 그로테스크하다— 어딘가 꿈틀대는 듯한 선, 조금은 불편하지만 분명히 아름다운 곡선들. 감정은 여기서 말해지지 않지만, 그 결 속에서 누군가의 내면을 지나가는 시간처럼 감지된다.


김혜리는 불안을 해결하거나 극복해야 할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 이 전시는 오히려 그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그 감정과 조용히 함께 머무는 방법을 상상한다. 도나 해러웨이가 말했듯, 우리는 이 복잡하고 균열 많은 세계를 정리하거나 치유하는 대신, 그 안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는 기술을 다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² 이 전시의 작업들은 그런 ‘함께 있음’의 기술을, 색의 결, 질감의 층, 이미지의 틈 사이에서 제안한다.


전시는 들여다보면 다섯 개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공간은 분명한 구조를 가지기보다는, 감정의 물결이 천천히 변주되는 하나의 궤적처럼 펼쳐진다. 작업 전반에 흐르는 리듬은 느리고 섬세하다. 공간은 반쯤 열린 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부는 비워져 있지만 결코 텅 비지 않는다. 중세의 성물함, 아르누보의 장식적 구조, 해양 생물의 표면, 판화처럼 겹겹이 쌓인 조형적 언어들이 작가의 기억과 감정을 조율하듯 엮이며 하나의 감각적 배열을 완성해간다.


이 전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말해지지 않은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하며, 그 감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천천히 배치한다. 그 조심스러운 흐름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감정과 조우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균실은 스스로를 차단하는 장치이지만, 동시에 감각의 회복을 위한 임시 공간이 된다.


여기, 우리는 잠시나마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는 시간을 허락받는다.









각주

  1.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Illness as Metaphor, 1978). 손택은 이 책에서 질병을 사회적 은유로 사용하는 관습을 비판하며, 병이 개인에게 가하는 이중의 폭력을 드러낸다. “병은 은유가 아니다”라는 선언과 함께, 고통을 더 정직하게 바라보는 윤리적 시선을 제안한다.
  2. 도나 해러웨이, 『곤경과 함께 머무르기』(Staying with the Trouble, 2016). 해러웨이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과 공존하는 방식, 즉 ‘곤경 속에 머무르기’를 통해 새로운 생태적·윤리적 관계 맺기를 상상한다. 불안을 제거하는 대신, 그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감각적 기술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