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쪽의 종이 Eight Folds

이봄 · 임성희
Bom Lee · Seonghui Lim

2026.08.26-09.13










 접힌 면의 안쪽으로
조유경(유영공간 디렉터)



무언가를 그토록 아름답다고 느낀 이유를 명확히 말하기 어려운 순간에도 눈은 그 장면을 기억한다. 한 권의 책을 펼쳤을 때 서로 다른 이미지와 기호가 빽빽하게 놓여 있으면서도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 모습, 종이를 넘길수록 점차 현실에서 멀어져 그 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경험. 임성희와 이봄은 만화를 바라보며 각기 다른 곳에 시선을 두어왔다. 임성희는 펼쳐진 이미지들이 이루는 구성과 움직임을 바라보고, 이봄은 책의 안쪽으로 이어지는 거리와 깊이를 더듬는다. 같은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보다 같은 대상을 이토록 다르게 보고 있다는 발견이 서로의 작업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했고, 두 사람의 대화는 이번 전시로 이어졌다.

한 장의 종이를 접고 중앙을 가르면 여덟 쪽의 작은 책이 만들어진다. 몇 번의 접기와 한 번의 자르기를 거친 종이에는 페이지의 순서가 생기고, 접혀 있던 면은 손이 움직일 때마다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전시 [여덟 쪽의 종이]에서 두 작가는 이 단순한 구조를 각자의 작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공통의 형식으로 삼는다. 종이를 접어 만든 여덟 쪽은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담고, 각자의 작업 안에서 회화의 흐름과 종이의 깊이로 다르게 펼쳐진다. 하나의 형식을 세우고 그 안에서 각자의 방법을 찾는 과정은 서로의 차이가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구체적으로 발견하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임성희의 그림은 풍경과 몸이 맞닿는 순간에서 시작한다. 비를 머금은 숲의 공기와 나뭇잎 사이를 통과한 빛의 따가움, 물 위와 아래가 갈리는 경계,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처럼 풍경이 몸을 스치며 남긴 인상을 작가는 빠른 선으로 붙잡는다. 그 선에는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지기 전, 시간과 움직임이 한꺼번에 포개진 장면이 남는다. 화면을 이루는 기호와 선에는 어린 시절부터 쌓여온 시각적 기억도 배어 있다. 만화책을 펼쳤을 때 이미지와 프레임, 이펙트가 한눈에 들어와 이루는 전체의 조형은 회화를 구성하는 시선에 스며들고, 화면에 겹쳐진 선과 색은 정지된 풍경 안에 흐름을 만든다.

빠르게 붙잡힌 선이 회화의 표면에 도착하기까지 임성희는 물감의 층을 쌓고 덜어내며 화면의 밀도를 조정한다. 서로 다른 질감과 색이 관계를 맺는 과정을 살피고, 여러 번의 판단을 거쳐 하나의 회화를 완성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그리려는 장면은 유화에서 여러 층이 포개진 화면이 되고, zine에서는 연필로 이어 그린 장면들의 흐름이 된다. 많은 노동을 거친 페인팅 곁에 작가의 생각과 가까운 연필 드로잉이 놓이며, 하나의 장면은 재료와 형식에 따라 두 갈래의 작업이 된다.

이봄에게 책은 손에 들고 펼치는 물체인 동시에 이미지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공간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면이 나타나고, 독자는 이미 지나온 장면을 기억하며 다음 장면으로 이동한다. 칸을 둘러싼 여백은 하나의 장면을 담는 창이나 액자처럼 작동하며, 그 안에서 인물과 말풍선, 효과선과 배경은 겹겹이 놓이고 서로 층을 오가며 하나의 공간을 이룬다. 이봄은 그 움직임을 바라보며 평면의 이미지 안에서 깊이를 느낀다. 얇은 종이를 한 장씩 넘기는 동안 현실에서 점차 멀어져 안쪽으로 들어가는 듯한 경험은 작가에게 끝을 알기 어려운 터널의 모습으로 남았다.

페이지를 따라 이동하며 느낀 거리와 깊이를 이봄은 종이의 굴곡과 층으로 옮긴다. 형압으로 생긴 자국과 희미하게 솟아오른 표면은 빛과 그림자에 따라 모습을 드러내고, 접힌 종이는 여러 면을 한 자리에서 마주 보게 한다. 해체한 인쇄물을 다시 연결한 구조와 건조대에 놓인 드로잉, 터널과 창살과 창문의 형상에는 페이지를 넘기며 경험한 공간과 깊이의 인상이 담긴다. 전시장에 놓인 작업을 따라가며 관람자는 종이의 표면에 새겨진 거리와 그 안쪽의 깊이를 헤아리게 된다. 검게 칠해진 판과 흰 종이가 바닥에 낮게 놓일 때 작업은 움직임을 멈춘 채 부피를 품으며, 비어 있는 면과 눌린 흔적 사이에 생겨나는 정적인 아름다움은 종이와 책을 대하는 작가의 애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두 작업을 나란히 놓으면 종이가 시간을 다루는 방향의 차이가 선명해진다. 임성희는 회화 한 화면에 포개온 시간을 zine의 페이지로 풀어내고, 이봄은 여러 페이지를 넘기며 경험한 시간을 한 장의 종이에 눌러 담는다. 만화에서 발견한 서로 다른 아름다움은 각자의 작업 안에서 이미지가 흐르는 방식과 종이가 깊어지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형식을 함께 정한 일은 두 작가의 선택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작업을 보여주고 의견을 주고받는 동안 처음의 구상은 여러 차례 달라졌고, 그 사이에 오간 생각과 선택도 전시를 이루는 내용이 되었다. 여덟 쪽에 놓인 장면과 흔적은 이번의 만남을 기록하고, 이후 각자의 작업을 향한 단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