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의 돌은 없는 거야.
김윤식 Younsik Kim
Feb. 11 - Feb. 22 . 2026
Wed - Sun
1p.m. - 7p.m.
Opeing reception 2026. 2. 11 (Wed) 5p.m.– 8p.m.
사진의 영혼이 이미지라면, 그 신체는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진 필름이었다. 적어도 디지털사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필름이건 디지털이건 시대를 막론하고 사진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그 이미지다. 디지털 사진 등장 이전의 시대, 그러니까 필름 사진의 시대에는 필름과 이미지가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기에, 어느 시점까지도 사진을 보존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필름이었다. 현상된 필름이 있어야 사진을 인화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더 크게 뽑거나 여러장으로 복제할 수도 있었다. 사실 이러한 작동방식은 지금도 유효하지만, 필름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은 크게 바뀌었다.
‘디지털 사진’이 사진의 지위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사진’을 떠올렸을 때, 디지털 사진이 아닌 필름 사진을 먼저 떠올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덕분에 ‘필름으로 찍은 사진’을 부르는 말은 ‘사진’이 아니라, ‘필름 사진’이 됐다. 이제 촬영한 필름을 현상하려면, 동네 사진관이 아니라 필름 현상이 가능한 현상소를 검색해 찾아가거나 택배로 필름을 부쳐야 한다. 현상소에 도착한 필름이 현상되면 디지털 이미지로 스캔된 데이터가 메신저 또는 이메일로 전송된다. 그리고 주문단계에서 ‘필름지 회수’ 옵션을 체크하고 배송비를 추가 결제하지 않았다면, 현상된 필름은 현상소에서 폐기된다. 이 과정에서 셀룰로이드 필름은 그저 ‘필름 사진’의 스캔 파일을 얻기 위한 과정의 부산물처럼 다뤄진다. 지금의 (대다수의) 필름 카메라 이용자들은 스캔된 디지털 이미지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진을 인화할 경우도 잘 고려하지 않을뿐더러, 굳이 필름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사진을 보존하는 것에 비해 더 많은 비용과 시간 그리고 물리적인 공간이 투여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는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우리는 필름 사진이 완전하게 디지털 사진으로 변환되었다고, 필름 사진은 이제 그저 디지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여러 방법 중 하나가 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이번 전시의 중심이 되는 영상 작업 <Umzug1 2023>은 작가의 가족묘의 (현대적 의미로서의) 이장 과정을 통해 또 다른 ‘변환’의 사례를 담담히 보여준다. 물론 ‘이장’의 사전적/전통적 의미는 ‘기존의 묘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이지 만, 현대적인 의미로서의 이장은 단순히 ‘이주’의 개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집집마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겠으 나) 일반적으로는 각기 떨어져 있는 위치의 묘지들을 한데 모아 관리의 편의성을 높이거나, 개발 이슈로 인해 묘지가 있던 부지를 매각해야 하는 경우에 이장을 실행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매장되었던 시신을 화장하는 절차가 포함 된다. 그리고 이는 목적이 어떠하든 인류 문명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여겨진 물질을 다루는 일이므로 격식과 절차, 그 리고 금기가 뒤따르며 관공서의 허가도 필요하다. 덕분에 인간의 신체가 화장을 거쳐 다른 형태와 속성을 가진 물질로 변환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유골함에 담긴 물질을 여전히 ‘인간의 신체’였던것으로 인식하고 이에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지점에서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와 조각의 물질성이 역전되는 현상을 ‘조각의 물리적 죽음’으로 정의하고 논의를 이어간다. 비록 이장의 목적 자체에는 시간과 비용의 논리가 작용했다 하더라도, ‘변환된 신체’에 대해서도 예의와 절차를 지키고 동일한 대우를 하는 것처럼 작가는 ‘조각의 물리적 죽음’과 이후 남겨진 조각의 신체에 대해 고민한다.
김윤식은 부업으로 작품과 전시 전경 기록 사진을 촬영했던 경험으로부터 전시 후에 조각 작품이 폐기물로 처리되거나, 훗날 재조립될 것을 약속받지 못한 채 해체/분해되어, 전시 전경 사진과 작품 도판으로만 남게 되는 모습을 보았다. 나아가 애초에 조각 작품의 물리적인 존재가디지털 이미지로 변환되기 위한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부산물처럼 다뤄지는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지금의 흐름이 단순히 보관과 운송에 따른 공간과 비용에 따른 문제로만 볼 것인가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단순히 조각 작품의 물리적인 생명력이 짧아지는 것에 대한 우려로 그치지 않는다. 조각들이 디지털 이미지로 변환되기 쉽도록, 즉 ‘작품의 정면’에 시간과 노력이 편중되는 방식으로 제작되거나, 질감·스케일감·능동적 관람 행위 등 ‘조각적 경험’보다 작품이 담긴 SNS 게시물의 이미지나 조회수에 더 신경쓰는 태도가 보다 ‘쿨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들을 마주하며 작가는 이러한 변화를 그저 이 시대의 ‘뉴 노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지, 나아가 디지털 미디어로의 이행이 과연 완전한 이주/변환을 가능케 할 ‘현자의 돌 (Lapis Philosophorum/Philosopher’s Stone)2 ’이 될 수 있는지 묻는다.
무언가가 디지털 이미지의 형식으로 변환될 때, 그 과정에서 의도적으로든 의도치 않게든 탈락되는 요소들은 분명 존재한다. 본질적으로 사진이나 영상 같은 광학적 미디어는 현실의 사물을 ‘복제’하는게 아니라 ‘재현’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광학적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재현된 대산은 어디까지나 2차원의 평면 이미지 형태로 변환된 것이지, 그 대상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이어서 회화 작품이 도판화되는 과정을 떠올려 보자. 사실 회화는 평평하고 납작한 형태를 띤 3차원의 사물이지만, 회화를 2차원의 평면 이미지로 간주한다는 전제로 캔버스의 측면과 후면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진다. 이어서 작품 표면의 미세한 질감이나 붓터치의 흔적 같은 요소들도 흐려져 뭉툭해진다. 그렇다면 이를 조각에 대입하면 어떠한가? 당연하게도 조각은 2차원의 평면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에, 평면에 비해 탈락되는 요소와 영역은 보다 방대해진다. 사진에 기록된 정면 이외의 모든 면과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재료마다의 질감, 작품이 놓이는 좌대나 구조물, 부피감 등 더욱 많은 요소들이 탈락된다. 더군다나 이렇게 배제된 요소들은 적어도 회화의 뒷면 같은 요소보다는 훨씬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도 잘려나가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사진 대신 영상이나 VR을 대입하거나 사진의 해상도를 비약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다면 이전에 탈락된 요소들 중 일부는 보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러한 기술들이 조각이라는 3차원 매체를 유의미한 수준으로 재현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작품을 직접 마주하면서 다양한 각도와 시점으로 바라보고, 작품이 놓인 공간에서 어떤 분위기와 감정에 휩싸이는 복합적인 경험의 영역은 매체를 막론하고 디지털 미디어로 완전히 변환 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다.
<Ghost Touch>시리즈는 일련의 텍스트가 세로 방향으로 스크롤되는 방식을 통해 디지털 인터페이스를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인터페이스’의 본질적인 정보 교환이나 상호작용은 수행하지 않는다. 유리판에 새겨진 문구 역 시 연결된 문장으로 기능하지 못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어렴풋한 인상만을 남긴다. 덕분에 외형은 기계적 장치를 닮았지만, 실제로는 (기계적 기능이 아닌) ‘조각적 기능’만을 실행한다. 이로써 <Ghost Touch>의 작품들은 관객에게 조각적 경험을 극대화하고 디지털 미디어로 이행될 수 있는 요소들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디지털 미디어로 변환/재현을 거치며 조각적 경험을 상실한 ‘납작한 조각’들과 대칭점에 놓이게 된다.
또한 <Umzug 2023>을 관람할 때 이용하게 되는 선베드 형태의 구조물 <Ground Seater>에 누웠을 때, 세라믹 재질의 블록들이 선사하는 차갑고 단단한 느낌 역시 디지털 미디어로 온전히 변환/재현될 수 없는 ‘조각적 경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세라믹 조각 시리즈 <Migration>으로도 연결된다. 작가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 조각의 표면과 구조를 해체해 이를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신체로 이주시킨다. 이는 디지털 미디어로 온전히 변환/재현이 불가능 한 형태와 재질, 작동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오히려 같은 이유로 신체로서의 조각이 더 오랫동안 보존될 가능성을 얻게 된다. 이처럼 작가는 ‘조각의 물리적 죽음’이라는 불가역적인 흐름 앞에서 이를 무력화하거나 전복시키기보다는 이에 대해 계속 검토하고 질문을 던지며 그 대안을 실험한다. 이를 통해 조각가로서 느끼는 무력감에 대응하고, 자신의 작업을 이어가고자 한다.
이기원 (미술비평가, 크리테리아 프레스)
Umzug1 : 작품의 제목인 ‘Umzug’은 독일어로 ‘이주’, ‘이사’를 뜻한다.
현자의 돌(Lapis Philosophorum/Philosopher’s Stone)2 : 중세의 연금술사들이 병을 치료하고 모든 물질을 황금으로 만드는 신비한 힘 을 가졌다고 믿었던 미신적인 돌. 이를 통해 물질을 근본적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고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