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술의 제단
The Altar of Metamorphosis

이준희
LEE JOON HEE




변신술의 제단:
그리고 마술사가 된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오는 사람들 모두에게 마술을 건다.


글| 한문희


 
서로 다른 무엇이 결합해 그 무엇도 아닌 모습이 되는 것. 변신술은 어떠한 종(種)이나 영역에 포함될 수 없기에 스스로도 명명할 수 없는 존재가 형성되는 방식이다. 이질적인 무엇에 갖는 혐오와 흥미는 낯선 감상도 아니지만, 섞이고 혼탁하기 이전의 상태가 정말 단일하고 깨끗한 것이기는 한가? 무결함은 도달할 수 없음과 동의어로써 폭력적인 수준의 결벽을 요구한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고, 모든 것은 언제고 다른 것과 만나며 복합적인 ‘되기’의 과정을 거친다. 심지어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의지는 주체를 견인하고 동시에 비웃는다. 주체를 움직이는 강력한 의지는 충족될 수 없다는 점에서 자기혐오를 동반하는데, 이것이 도달하고자 하는 바가 정상성과 같은 외적 동기일 때 더욱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이준희의 작업은 온전한, 무결한, ‘정상’적인 주체라는 환상을 시니컬한 농담으로 취급한다. 작가는 화면 속에 기묘하게 융합된 괴물을 등장시키면서 정상성이 위계적으로 확립한 구분을, 나아가 수평적인 차이의 경계를 무화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은 방문객에게 마법을 걸고 괴물이 되는 법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제단으로 변모한다.  

요컨대 가장 처음 마주하게 되는 〈나무가 타오르는 지도〉(2026)는 변신술의 도해(圖解)에 다름 아니다. 유사하기도, 완전히 생뚱스럽기도 한 화면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즉각적인 이해가 불가하며 어떤 방식의 해석도 엇나갈 수 있는 알레고리가 뒤엉킨다. 알레고리는 각자의 사유를 신뢰하며 혼돈 안에서 떠오르는 수백 개의 새로운 의미와 상상을 허용하고, 해석의 공존과 경쟁은 긴장을 자아내 역동 속에서 자신이 가장 납득할 수를 좁히게 한다. 말하자면 이 ‘지도’를 보는 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발생하는 것이다. 각각의 사물을 그것이 의탁하고 있는 맥락과 떼어내어 형태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추론하거나―별과 등대, 화살표와 새, 토성과 사과 따위의―, 동시에 우리는 그 모든 이미지와 위치에 의미를 부여하며 하나의 이야기로 감싸 제멋대로 시간의 흐름을 설정할 수도 있다. 그 모든 추론에는 각자의 자아(self)가 투사되어 있고 이렇다 할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 의뭉스러운 도해는 결국 스스로를 투사함으로써 자신을 노출할 수밖에 없는 방식의 해석만을 가능하게 만들기에 앞에 선 이는 조용히 벌거벗겨진다. 우리는 이제 변신술을 체화해 변태(metamorphosis)하거나 조용히 불태워지면 된다. 기꺼운 선택지는 아마 하나일 것이다. 

복도는 변신한 존재들의 공간으로, 서까래에 놓인 괴물과 조우한다. 제멋대로 생겨 색도 모양도 다른 비정형적인 생김새는 얼핏 우습게 보인다. 세계에서 소외된 괴물적 타자는 이 제단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며, 공간의 가장 높은 곳을 점하면서 역전을 말한다. 가장 취약한 자아를 마주한 우리와 그 취약함을 오래 전에 삼켜낸 혼종으로서 괴물은 뒤바뀐 위치에서 위화감을 느낀다. 귀엽지만 위협적인 타자들과, 거대하지만 취약한 우리의 어그러짐을 말이다. 이러한 역전과 조롱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지만 진짜이지는 않은 것으로, 제단에 배치된 가짜 촛불과 상통한다. 사실 이는 회화라는 매체의 특징이기도 하며 소수자로서의 행동양식과도 닮아 있다.  

타오르는 낮의 길잡이 지도를 붙잡고 해질녘까지 길을 헤매었다면 밤은 길 잃은 모든 이를 흡수하는 안식처가 된다. 광기의 희락에 기꺼이 휩쓸리고 모두와 접붙음으로써 모두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멸망과 탄생의 디스코 댄스〉(2026)는 임계점에 다다른 이질적 형태들이 산산이 폭발하며 분출하는 순간을 포착하는데, 이 에너지는 캔버스 바깥으로 넘쳐 나간다. 〈나무가 타오르는 지도〉와 〈창틀의 일〉 등에서 보여졌던 화면 속 액자가 자취를 감추며 불씨는 공간으로, 바깥으로 닿는다. 변신은 거듭할수록 과잉을 예보한다. 이는 〈불의 꿈〉(2026)으로도 이어져, 하나의 촛불에서 나올 수 없는 양의 화염이 반짝이는 과장적 제스처와 함께 등장하는 것에서 명확해진다. 과잉-폭발과 해체의 순간에 중심점은 공교롭게도 항상 좌측에 몰려 있어, 바른쪽(right)이라는 기준을 우회한다. 시니컬한 웃음기는 여기서 실상 비명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억압과 쾌락, 우울과 유머 따위의 것들이 뒤엉켜 내는 소리 따위의 것, 한계를 매번 실감하면서도 다시 부딪혀야만 한다는 내부의 충동을 표현해야만 하는 것.


아니, 아이는 그 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해방의 외침소리를 지르며 앞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신은 언제나 과정 중의 상태이며, 과잉이 인도하는 폭발로써 분출할 수밖에는 없다.



1)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역(도서출판 길, 2007), 114.
2)김은주, 여성-되기: 들뢰즈의 행동학과 페미니즘(에디투스, 2019), 136-137.
3)로지 브라이도티, 변신: 되기의 유물론을 향해, 김은주 역(꿈꾼문고, 2020), 386.
4)전창배, 알레고리와 상징, 비교문학 67집(2015년 10월), 302.
5)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연금술, 이상익 역(한국융연구원,2022), 145.
6)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114.






2026.03.04. - 0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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