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mo KANG, Shishi Jihyun MIN
2025.07.30 - 08.10.
어느 날, 무심코 지나던 거리가 낯설게 느껴진다. 늘 앉던 벤치, 자주 잡았던 손잡이, 들려오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친숙하던 것들이 조금씩 밀려나고, 어쩌면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선 세계가 이질적인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것은 어떤 불쾌감이나 거부감이 아니라 문득 세계가 스스로의 얼굴을 드러내는 조용한 순간이다. 일상에 스며 있던 무수한 층위들이 얇은 막처럼 갈라지고, 그 틈새로 우리가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것들이 고개를 내민다.
《구토: The Nausee》는 이러한 틈과 균열의 감각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강종모와 시시민 두 작가가 각자의 방식으로 수행해온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존재’에 대한 탐구의 결과다. 그들은 주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타자와 환경과의 얽힘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는 존재임을 전제한다. 그리고 재현보다는 형성과 소멸, 고정보다는 흐름에 주목한다. 그 과정에서 명확히 볼 수 없는 형상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진동하는 감각들이 조형 언어로 구성된다.
강종모의 작업은 경계가 불분명한 세계를 전제한다. 형태는 고정되지 않고 의미는 단일한 해석에 귀속되지 않는다. 존재는 자족적이지 않으며, 항상 타자와 관계 맺음 속에서 재구성된다. 그는 조각과 설치를 중심으로 한 조형적 실험을 통해 이러한 유동성과 생성성, 그리고 얽힘을 드러내고자 한다. 사회라는 구체적인 맥락 속에 스스로 속해 있는 우리는 고정된 정체성과 관계의 틀을 넘어서며 살아갈 때 필연적으로 긴장상태에 직면한다. 그는 이러한 긴장 속에서 새로운 얽힘을 실험하고, 완결되지 않은 세계를 잠정적으로 다시 엮어보는 방식을 모색한다.
시시민의 작업은 일상 속 감각의 비율이 무너지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익숙한 세계가 낯설게 변모하는 순간, 그곳은 입구도 출구도 명확히 보이지 않는 공간이 된다. 외부의 개방성은 원래의 의미에서 벗어나 폐쇄성을 갖추게 되고 그녀는 이를 단순히 재현하는 대신 감각의 전환을 조형, 영상, 사운드로 번역한다. 내면의 긴장과 외부 자극이 충돌하며 생겨나는 그녀의 작업들은 중심 없는 부유의 상태에서 서로를 지지하는 부표처럼 얽혀 있다. 시시민은 일상성과 이방감, 이것들이 확장하고 수축하는 순간, 청각과 시각, 존재와 감각 사이를 떠다니며 현실과의 새로운 접촉점을 탐구한다.
두 작가의 작업은 각각 다른 매체와 지점을 통해 나아가지만,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 존재’를 마주하는 공통의 감각을 공유한다. 그들은 존재를 고정하지 않고, 명료화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모호함 속에서 우리 자신과 세계를 다시 감각하게 한다. 《구토: The Nausee》는 말보다 감각에 가까운 전시다. 세계가 낯설어지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다시 묻게 된다. 이 전시는 그 질문이 시작되는 자리다.

강종모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나의 작업은 고정된 본질이나 자족적인 주체에 대한 믿음을 거부한다. 나는 존재를 어떤 중심적인 실체나 자기 동일성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는 고정된 객체들의 총합으로 환원될 수 없는, 끊임없이 얽히고 감응하며 생성되는 사건들의 장(場)으로 펼쳐진다. 세계는 객체들의 합이 아니라 사건들의 리듬이다. 그 안에서 ‘존재’란 닫힌 구조물이 아니라 항상 관계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다시 쓰이며, 다시 구성되는 개방된 형식이다. 타자와의 접촉, 마주침, 충돌, 스침은 존재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동시에 그것을 재정의한다. 이런 관계적 존재론은 나에게 세계를 더 이상 확정된 구조나 정태적인 실체로 보지 않게 만들며, 생성과 변형, 그리고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언어 속에서 사유하도록 이끈다.
나는 존재하는 것들이 본래부터 자족적이고 독립적으로 완결되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존재는 서로의 얽힘과 접촉, 감응을 통해 조건 지워지고, 상황 속에서 매 순간 달리 구성된다. 이 관계적 얽힘은 나의 작업 전반에 퍼져 있는 중심적인 사유 방식이다. 내가 사용하는 설치, 조각, 사진 등과 같은 다양한 매체는 단지 표현 수단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시간, 공간, 빛, 소리, 물질, 관객의 감각과 움직임이라는 다양한 요소들과 함께 다층적으로 얽히며 의미를 단일하게 고정시키지 않고 지속적으로 열어둔다. 하나의 작업은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사건이며, 정지되지 않은 시간의 층위 위에서 흔들리고,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는 생성의 리듬을 따른다. 나에게 있어 작업이란 완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흔들림과 소멸, 변형과 재구성이라는 개입을 통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살아 있는 장면이며 사건이자 관계이다.
나는 경계가 불분명한 세계를 전제한다. 그 세계 안에서 형태란 단일하고 고정된 결과가 아니라 일시적인 응축이자 흐름의 가시화에 가깝다고 본다. 의미는 결코 단일한 해석에 의해 완전히 포획되지 않고 언제나 다중적인 층위와 잠재적 전환 가능성을 지닌다. 존재는 단독으로 닫혀 있지 않고 언제나 타자성과의 관계, 마주침, 흔들림을 통해 재구성된다. 이러한 관계적 존재 방식을 나는 작업의 방식과 논리 안에서 구현하고자 한다. 유동성, 생성성, 비결정성은 나의 미학적 태도를 넘어 존재에 대한 윤리적 개입의 방식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 문화, 제도라는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 살아가며 그 안에서 정해진 정체성이나 역할에 순응하도록 강제된다. 그러나 나는 작업을 통해 이러한 구조화된 틀을 벗어나 보다 미끄럽고, 다의적이며, 열린 존재 방식을 탐색하려 한다. 그것은 어떤 확정적 결과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속적인 긴장 속에서 질문을 생성하는 하나의 사유의 장을 여는 일이다.
나의 작업은 이 긴장 상태, 이 미완의 상태에서 새로운 얽힘을 탐구한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질서를 뒤흔들고 완결되지 않은 세계를 잠정적으로 재조직하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들의 구조를 실험하는 시도이다. ‘열림’, ‘생성, ‘감응’, 이 세 가지는 나에게 단순한 미학적 태도를 넘어서 존재론적 선택이자 윤리적 실천으로 다가온다. 나는 작업을 통해 스스로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에게 가닿고, 어떻게 서로를 변형시키며 어떻게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새로운 존재 방식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조형 언어의 수준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그 자체를 조심스럽고 감각적으로 다시 쓰려는 개입이며 마침내 예술이 세계에 개입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윤리적 상상이다.
시시민
요즘 들어 자주 나를 사로잡는 것은 어떤 ‘상태’다. 일종의 부유감, 거의 감지되지 않을 정도의 불편함. 마치 내 주변의 세계가 갑자기 너무 선명해지고,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오면서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어지고, 사소한 몸짓 하나에도 현기증이 일어나는 순간. 그건 위기도 아니고, 극적인 사건도 아니다. 다만 아주 미세하지만 강렬한 ‘전환’이다. 사르트르가 『구토』에서 묘사한 바로 그 감각에 가까운 이 상태는,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만들게 한다.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료로 삼고 그 안에 더 머무르기 위해.
나는 종종 생각한다. 어디까지 나 자신의 삶과 밀착한 채로, 그 감각을 번역할 수 있을까. 그것을 단순화하지 않고, 예술의 언어로 옮길 수 있을까. 나의 작업은 언제나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격렬한 어떤 긴장 위에 놓여 있다. 익숙한 일상과 내면의 격렬함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겨나는 마찰을 어떻게 시각화 할 수 있을지 질문한다.
본 작업은 주로 감각적인 ‘표류’에서 출발한다. 익명의 군중이 지나가는 거리 위에서, 나는 나의 감각과 마주친다. 거리는 파편화되고, 불안정하며, 자극으로 과포화된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하나의 몸으로 발을 딛고 주변을 관찰한다. 이 순간들은 내면의 긴장감을 일시적으로 외면한채 외부의 환경에 나의 몸을 던져놓는 것과도 같다. 나를 둘러싼 소리, 이미지, 분위기를 수집하고, 그것들을 따라 걷고, 멈추고, 적는다. 이 상황 속에서 큰 것들이 작아 보이고, 사소한 것들이 비정상적으로 크게 인식되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마치 이 순간을 내 몸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한 발짝 떨어진 위치에서 지켜보는 듯한, 탈육화된 감각을 느끼는 시점이다. 뒤이어 잠시 접어둔 내면의 긴장감이 다시 비집고 나오며 1인칭 시점과 3인칭 시점이 얽히게 된다. 나를 압도하는 것들과 내가 그것에 반응하는 방식이 섞여들어 글이 되고, 영상이 되고, 다시 나의 내면을 투영하는 풍경이 된다.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며 영상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듣는다는 행위는 무수한 자극 속에서 가라앉지 않기 위한 부표이다. 영상 작업을 위한 글을 완성하고 나레이션을 녹음한 뒤 그것을 여러차례 들으며 (가까운) 과거에 기록된 이야기들이 내게 주는 청각적 심상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그 고민은 음악 작업을 통해 번역되고, 완결된 소리를 반복해서 들으며 그것이 주는 시각적 심상이 조각 작업으로 연결된다. 음악을 만든다는 것은 자극의 기록들을 다시 검토하며 그 안에 있는 지속적인 이방감에 재몰입하여 건반과 신디사이저라는 수단을 가지고 반응하는 과정이다. 이 때에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방식으로 반응하는데, 결국 어떤 멜로디가 완결될지 전혀 모르는 채로 시작된다. 앞서 영상을 만들 때처럼 내게 어떤 사건이 다가올지 아무런 예측도 하지 못한 채 집 밖으로 나서는 것이다. 음악 작업실에서 나레이션의 내용을 듣고 또 들으며 여러 조각의 순간에 멜로디로 반응을 하다보면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음악 조각(elements)들이 생겨난다. 음악을 만들다보면 잠에 들기도 하고 계속해서 틀어둔 나레이션 소리에 다시 각성되어 깨어나기도 한다. 이 경험들은 곧 시각적 심상을 떠올리게 하는데, 단단하고 뭉툭한 무언가가 원래의 부피와 규칙을 벗어나는 것과 같은 심상이다. 뻣뻣하고 길다란 나무조각, 미끄럽고 차가운 금속 표면을 바라본다. 그것이 그것 자체로 있는 것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규칙과 순서를 갖춘다는 운동성(movement)이 떠오르고 뒤이어 나의 몸을 통한 반복적인 실행이 시작된다. 나무는 균일하게 파내어진 틈 덕분에 새로이 유연함을 갖추게 되고, 표면이 긁히고 파내어진 알루미늄은 평면에서 입체로 일어서게 된다.**
감각의 비율이 흔들리는 그 지점에서, 이것들은 명확한 중심이 상정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조정되고 재편되는 체계다. 출구 없는 미로 속에서 영상, 소리, 입체 작업들은 서로에게 부표와 같이 서로를 지지하며 해석될 수 있는 관계성을 갖춘다. 다시 말해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의 확장과 수축이 동시에 일어나는 순간들을 구체화하고 분석하며 현실과의 접촉 지점을 재정립 하려는 실천이다. 그것은 단절되어 있고, 뒤섞여 있으며, 때론 모순적이다.
Jongmo Kang
“It was only silence that remained in the face of the absence of ca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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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work rejects the belief in fixed essences and self-sufficient subjects. I do not conceive of existence as a central substance or self-identical entity. Rather, the world cannot be reduced to a sum of fixed objects; it unfolds as a field of continuously entangled, responsive, and generative events. The world is not an aggregation of objects, but a rhythm of events. In this rhythm, “being” is not a closed structure but an open formation, constantly reborn, rewritten, and reconfigured within relations. Encounters with others—contact, collision, brushing against—blur the boundaries of being and simultaneously redefine it. This relational ontology prevents me from seeing the world as a static or finalized structure, and instead leads me to think in terms of language shaped by emergence, transformation, and ongoing interaction.
I do not believe that beings are complete or autonomous in themselves. Rather, everything is conditioned and formed through its entanglement, contact, and resonance with others. This relational entanglement lies at the heart of my entire artistic practice. The various media I work with—installation, sculpture, photography—do not merely function as tools of expression. They operate as fields in which time, space, light, sound, material, and the viewer’s sensory movement intertwine in multi-layered relations, refusing to fix meaning into a single form. A work is not an endpoint, but a living event—one that follows the rhythm of time that is never at rest, constantly trembling, vanishing, and reemerging. For me, a work is not about reaching completion. It is a dynamic field that lives through dislocation, disappearance, transformation, and reconstruction—a network of relations in motion.
I presuppose a world where boundaries are inherently blurred, where form is never static, and meaning is never captured by a singular interpretation. Being is never self-sufficient; it is always reorganized through its entanglement with otherness—through encounters and ongoing reformation. I aim to manifest this mode of relational being through my practice. Fluidity, generativity, and indeterminacy are not simply aesthetic attitudes; they are ethical and ontological gestures. We live within the concrete context of society, culture, and institutions, which often demand fixed identities and roles. But through my work, I attempt to bypass these structured frames, seeking more slippery, pluralistic, and open ways of existing. The goal is not to present a definitive outcome but to create a space of thought where questions are continuously generated amidst ongoing tension.
My practice investigates new entanglements within this state of tension and incompletion. It attempts to reconfigure an unfinished world tentatively, to experiment with structures of possibility that have not yet arrived. Openness, emergence, and responsiveness—these are not merely aesthetic orientations for me and they are existential choices and ethical practices. Through my work, I continually ask myself and the viewer : How do we touch, how do we entangle, and how do we construct new modes of being? This question does not remain at the level of artistic gesture alone. It is a careful intervention that seeks to rearticulate our ways of relating to the world, and ultimately, an ethical imagination of how art can intervene in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