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Echo





최인엽 Choi Inyub


2025. 10. 15. WED – 11. 2. SUN





“저는 하양이 편안합니다.”


불과 1년 전 최인엽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화면은 다소 어두워졌다. 어둑한 신작들로 채워진 이번 전시는 내면의 깊숙한 감정을 꺼내어 이를 직면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화면을 채운 어둠이 그가 느끼는 가장 편안한 색이 아님에도 말이다.


《Volcanic Echo》는 작가의 감정을 화산의 운동성에 빗대어 추상적으로 표현한 전시다. 인간관계에서 촉발되는 부정적인 감정은 과거 최인엽의 작업에서 밝고 경쾌한 색채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검은색, 붉은색, 푸른색이 주된 색으로 사용되었으며, 거친 필선과 마블링, 유약이 함께 활용되어 동적이고 우연적인 효과가 가미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는 은퇴 후 옻칠을 시작하신 어머니의 영향이 있었다. 작가는 근래 옻칠, 주칠, 자개 공예품을 일상 속에서 접하게 되었고, 비밀을 품고 있을 것 같은 은은한 빛과 깊이 있는 색채에 눈길이 갔을지 모른다. 안 좋은 기억 또한 지나면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경험으로 변모되듯 부정성을 띠는 색은 쌓이면 쌓일수록 영롱함을 내뿜으며 또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그의 그림에서 검은색과 붉은색, 청묵의 검푸른색은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려는 시도를 보여주며, 금분과 은분 등 작품에 사용된 펄 안료는 화면에 층위를 만들며 내재된 시간성을 반짝인다.


독일 유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최인엽은 퍼포먼스, 영상, 설치, 회화, 도자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실험을 거듭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중 회화와 도자가 주로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매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설치되어 전시 공간과 조화를 이루었다. 이를테면 얇은 비단에 그려진 회화 작품 <투명한 메아리는 흘러갔다>는 캔버스 천에 그려진 다른 회화들과 달리 공중에 매달려 설치되었다. 이 때문에 지지체인 비단이 가진 유연성과 그 속에 스며든 안료의 질감은 더욱 돋보인다. 유영공간을 보고 우주를 떠올렸다는 최인엽의 말마따나 도자 시리즈 <별 조각> 또한 비즈를 꿰어둔 빛나는 은줄로 설치되어 허공을 부유하며 무한한 공간감을 자아낸다. 해당 작품들은 어두운 유약을 바른 백토를 고온에 소성한 후 그라인더로 표면을 갈아내어 제작되었는데, 서로 다른 안료의 층위와 자연스러운 요철이 드러나기 때문에 마치 자연에서 채취한 사물을 닮게 되었다. <피어오르는 드로잉>, <이쪽은 저쪽을 기억하고 있다>처럼 바닥에 놓인 도자 작업들은 오래된 퇴적물처럼 자리하거나 회화 주변에 절벽과 같은 모습으로 우뚝 세워진다. 그리고 작가의 마음이라는 하나의 풍경으로부터 뚝 떨어져 나온 파편들처럼 서로 연결되고 다시 또 흩어진다. 그의 작업은 우주로 상정된 전시공간을 유유히 헤엄치며 새로운 감정의 파장을 만든다.


이렇듯 최인엽은 다양한 매체와 조형 언어를 시도하며 작업 세계에 변주를 주었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 세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선’이다. 이전의 작업과 유사하게 회화에서는 감정의 형상을 실로 수놓은 드로잉을, 도자에서는 연필과 세필로 그려진 드로잉을 확인할 수 있다. 최인엽에게 드로잉은 단순히 본 작업을 들어가기 전의 준비 과정이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이 아니다. 그에게 드로잉은 자유로운 움직임을 불러들이는 중요한 매체다. 자유로운 선들은 묵직한 질량, 사각의 지지체 등 작품이 가진 틀을 벗어나 새로운 방향성을 품는다. 그의 드로잉은 규칙과 질서를 중시하는 작가의 타고난 기질을 뒤흔드는 원초적 리듬으로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감정의 흐름을 반영한다.


심연에서 길어 올린 감정이 바깥으로 흘러넘친다. 그것은 어느 순간, 땅을 흔들며 거대한 사건이 된다. 이번 전시의 중요한 소재인 화산은 지하 깊숙이 응축된 에너지가 지표면을 뚫고 나오는 현상이다. 그 격렬한 움직임은 예측할 수 없고, 파괴와 생성이 동시에 일어나는 역설의 순간을 품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러한 화산의 이미지를 통해 부정적인 감정의 폭발을 넘어, 작업 세계의 전환과 변화를 꾀한다. 최인엽의 화면 속 평온은 언제나 조용한 긴장으로 뒤틀려 있다. 그 안의 힘은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며, 과거의 흔적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불러낸다. 《Volcanic Echo》는 분출과 울림, 소멸과 생성, 어둠과 빛이 겹쳐지는 풍경을 보여준다. 그곳에서 우리는 작품과 마주하며,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미세한 진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글  |  정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