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aze from nonexistence
없었던 것으로부터의 시선




Dayoung Ryu
유다영


2025. 11. 04 - 11. 09





유다영식, 소설적 사진찍기






글. 임이정



고백건대 나는 사진을 잘 모른다. 다만 작가 유다영을, 그녀의 사진을, 애정을 담아 꽤 오랫동안 지켜본 친구이자, 소설가이다. 열린 차 창문으로 불어오던 바람을 맞으며 작업에 대한 고민을 나누던 다영의 뺨이 유난히 붉었던 기억이 난다. 다영은 사진을 통해 시각적으로 확보되지 않는 ‘시선’을 프레임에 정착시키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사진기라는 도구에 대한 연구이자 작 업적 실험의 일환이었다. 《없었던 것으로 부터의 시선》 이라는 개인전은 작가가 몇 년간 골몰해 오던 고민의 흔적과 발자취다.

이번 다영의 작품을 보고 받은 첫인상은 ‘역시 다영답다.’ 는 것이었다. 정적이고 일상적인 이미지에서 풍기는 특유의 몽환적이고 오묘한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시명에서부터 작품에 적혀있는 각각의 타이틀까지, 그녀가 고심해서 적었을 길고 짧은 문장들 때문이었다. 사진에 점자 텍스트를 입힌 다영의 이전 전시, 《점자 이미 지에서 파생된 타이포 시와 노래 2023》 만 봐도 알 수 있듯 그녀의 작품에서 문자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자는 다영의 작업에 있어 작품 설명을 위한 부차적인 요 소가 아니라 작품 자체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그녀가 평소 서사와 텍스트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혹은 내 직업 적인 이유에서인지 나는 다영의 작품이 소설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때문에 다영이 포착한 이미지들이 세상에 나온 방식을 소설적 사진찍기라고 표현하고 싶다.
사소설 등의 예외는 있을 수 있지만 거의 모든 소설은 픽션을 원칙으로 한다. 있는 것을 찍는, 사물을 가장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사진은 어쩌면 소설과 정반대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영의 작업을 소설적 사진찍기라 말한 까닭은 그녀의 작업이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고무줄놀이하듯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일 차적으로 감상한 다영의 작품은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이미지를 미시적으로 담고 있 다. 창문과 꽃, 커튼과 물가, 발레 슈즈와 계단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차적으로 이미 지를 텍스트와 함께 감상하면 작품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감상자에게 다가온다. ‘없었 던 것’ 이라는 허구의 눈을 통해 바라본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는 창문과 꽃, 커튼과 물가, 발레 슈즈와 계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영의 작품은 사실과 실체라 는 사진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허구와 상상을 심어놓고 있다.


(a)부터 (h)라 명명되는 ‘없었던 것’들은 죽은, 보이지 않는, 꿈속의 어떤 것일 것이 다. 봤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 존재함에도 투명하다고 치부되는 것, 한 번도 이름 을 가져 본 적 없는 이들이다. 이 시선은 소설 속 3인칭 관찰자를 떠올리게 한다. 사 건에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자, 사건에 참여하지 않거나 혹은 배제당한 자들 말이다. 다영은 이들, 3인칭 서술자를 1인칭으로 끌고 온다. 그들을 주체의 자리에 올려놓음 으로써 말이다. ‘없었던’ 이들의 시선은 다영의 카메라를 빌려 지극히 절제된 색감으 로 발현된다. 그것이 다영이 ‘없음’에 존재성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내게 다영의 작업은 ᄀ 혹은 ᅡ 와 같이 혼자 따로 떨어져 있는 자모를 연상시킨 다. 그 자체로는 의미를 연상시키기 힘든 커튼 조각, 묶여 있는 리본, 길에 피어있는 풀줄기가 전면에 등장한다. 의식 없이 스쳐 지나가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차리 지 못할 수도 있다. 의미도, 형체도 갖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다영의 작품은 정물을 포착하기보다는 특정 지점을 확대하거나 사진 전체를 뿌옇게 하고 지우기 바빠 보인다. 물질의 단단함, 분명함은 본질을 흐리고 감추기만 한다는 듯이 말이다. 이는 감상자의 시선을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게 하기 위한 일 종의 장치이다. 엉킨 리본이 고요한 물줄기처럼 파동 하는 모습<시선 (d) - 계속되는 춤>이라던가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조각<시선 (f-1) - f의 답장 (닿을 수 없어서 모든 게 무너지는 중일 때 그대로의 시선)>을 보라. 언제나 거기 있었지만 미처 인식 하지 못했던 이미지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텍스트, 즉 타이틀은 다영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정한 가이드를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이드가 이끄는 곳으로 갔을 때 감상자들 은 의외의 곳에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 토끼를 따라간 앨리스처럼 말이다. 다영의 타이틀이 우리를 이끄는 곳은 논픽션의 세계다. 농담, 또는 말장난처럼 보이는 타이틀 들은 사진에 느낌표(!)를 찍기보다는 물음표(?)를 찍게 만든다. 미지수를 연상시키는 알파벳으로 표기된 이 시선들은 <시선(c) - 언어가 없는 곳으로부터 여름에 받았던 편지> 라던가 <시선 (f-3) - 멀리 확장되었던 f의 꿈>처럼 존재하지 않는 시간, 대상 을 담고 있다. 심지어는 <시선(g) - d의 계속되는 춤을 바라보는> 이라던가 <시선 (g-1) - f의 꿈에서 편집된 기억 장면>처럼 실체가 없는 이 시선들은 상호적이기도 하다. 다영은 작품의 타이틀을 통해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미지를 (f) –1,2,3 처 럼 연속된 선상에 의도적으로 배치하기도 한다. 분명 이미지가 있지만 감상자들은 그 것만으로는 대상을 확신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다영이 만들어놓은 ‘타이틀’은 눈에 보이는 사실적 이미지에 대한 반발이며 상상과 이야기에 대한 환대로 작용한다. 텍스 트와 줄다리기하며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제 감상자의 몫이다.


다영의 작업은 흥미로운 방식으로 감상자를 이끄는 매력이 있다. 그녀의 작품이 하 나의 상으로 우리 안에 맺히게 하기 위해선 감상자의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경험을 적 극적으로 활용해야만 한다. 최초에 작품 앞에 마주 설 때는 ‘없었던 것’의 시선을 빌 려 대상을 감상하지만, 이후에는 개개인의 상상이라는 필터를 더해 제3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없었던 것을 통해, 없었던 것을 창조해 내는 연금술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